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래디컬 페미니즘 (문단 편집) ==== 독재정권 하 민주화운동과 비교하려는 시도의 오류 ==== 민주화운동과 비교하는 시도까지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337594|‘바람계곡의 페미니즘’ 인터뷰 전문]] 이 인터뷰에선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까지 언급하는데 이 경우는 당시 독재정권이 불법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군대, 감옥, 경찰 등의 지배 기구를 통해 민중을 향한 합법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상태였다. 비교기준이 잘못된 것이다. 이들은 사회적 갈등을 위해 폭력을 쓴 게 아니다. 또한 80년대 민주화운동과 엮는 궤변도 나온다. >이택광= “ 페미니즘이 점차 대중화된다면 지금의 (남성혐오) 움직임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1980년대 민주주의를 촉구하던 운동권에서 화염병 던지는 등 과격한 주장(행동)을 펼쳤는데, 이는 합리적인 논의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지금의 페미니즘 과격행동도) 일시적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 >Q. 한국의 페미니즘이 ‘여권(女權) 신장’보다는 ‘남성혐오’에 가깝다는 지적도 있다에 대한 이택광의 답변[[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375877|#]] 80년대에는 [[광주학살|지나가는 시민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살해하고 총칼로 찔러죽이고 총을 난사해죽였고]], 쿠데타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고문과]]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조작]],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심지어 살인은폐]]까지 하던 시대이다. 현재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폭력을 자행하는가? 아니 무엇보다도 아무런 권력도 없는 평범한 남성들이 그런 폭력을 자행할 힘이라도 있는가? 그러한 걸 2018년 페미니스트의 과격한 주장으로 강제로 대입시키는 궤변을 하고 있다. 메갈리아와 민주화운동을 비교하는 궤변으로 가지고 오는 것 중 하나는 [[5.18 민주화운동]]이다. 5.18에선 시가전도 했는데 왜 메갈리아가 문제냐는 주장이다.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은 "'''광주 시민군은 동족을 향해 총을 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6월 항쟁 참여자들은 경찰을 향해 쇠파이프를 휘둘렀죠? 이유는 딱 하나예요. '''좋은 말로 했을 때 듣지 않았으니까'''!"라며 메갈리아 운동을 옹호했다. >그렇죠.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니 민주주의에 걸맞게 점잖은 말투와 신중한 행동거지로만 해야 할까요? 독립운동은 조선 땅의 평화를 위한 싸움이니 평화라는 가치에 걸맞게 비폭력주의로만 해야 했을까요? 정말 그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누구도 피 흘릴 필요가 없고 누구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요. 그러나 현실은 골방에 틀어박혀 이래라 저래라 훈수나 둘 줄 아는 인간들이 헤아리기엔 복잡하기 그지없어요. 왜 안중근은 총을 쏠 수밖에 없었죠? 왜 광주 시민군은 동족을 향해 총을 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6월 항쟁 참여자들은 경찰을 향해 쇠파이프를 휘둘렀죠? 이유는 딱 하나예요. 좋은 말로 했을 때 듣지 않았으니까! > >https://baramfemi.postype.com/post/451563 >https://archive.is/N1OJS#selection-827.2-827.367 > >-메갈리아가 비판받는 대목은 아마도 ‘혐오에 혐오로 맞선 방식’ 미러링 때문이 아닌가한다. “남여 차별도 반대하지만 메갈리아(의 혐오)도 반대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한겨레 구성원이나 독자들 중에도 상당수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은 불의에 맞선 저항이 항상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즉 동학농민운동이든 3.1운동이든 4.19든 5.18이든 6월 항쟁이든 광우병 촛불집회든 민중총궐기든 그들에게는 죄다 폭도들의 난동일 수밖에 없다. 왜냐고? 폭력이 실제로 있었으니까. 안중근은 총으로 사람을 쏴 죽였고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그들은 아마 안중근과 윤봉길도 테러리스트라 부를 것이다. 왜냐고? 폭력이 실제로 있었으니까. 그들의 기준으로는 '''시민군이 공수부대와 시가전을 벌인 5.18도''',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난무한 6월 항쟁도, 경찰 버스를 부순 민중총궐기도 전부 불법 폭력 집회다. 왜냐고? 폭력이 실제로 있었으니까. 그러나 폭력이 위치한 사회적 맥락을 따질 줄 아는 사람이라면 불의에 맞선 저항을 폭력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오직 가장 큰 폭력의 편에 선 존재들만이 폭력을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구분하는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국가 폭력의 편에 선 사람들은 정부에 맞서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저항을 얼마든지 폭력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이 전체주의적 권력 집단에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337594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71483|군사 마이너 갤러리]] 그러나 [[군사 마이너 갤러리]] 유저들이 이에 대해 조사해보니 실제 '''광주 시민군은 시가전을 벌이지 않았다.''' 시가전을 했다고 쳐도 이를 워마드와 비교할 가치가 없는게, 시민들은 정부군에 맞서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하나뿐인 수단으로 총을 들수밖에 없었지만, 워마드는 오늘날 폭력 아니고도 목표를 달성할 수단이 많은데도 미러링 아래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 >그럼 이에 대해 진짜 전문가분의 설명을 들어보자. > >「사례 38)오후 4시 43분, 전남대학교 병원 12층 옥상에서 젊은 사람 3~4명이 무엇인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도청 옥상의 공수부대원들이 혹시 발포라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부산하게 움직이던 이들 사이로 LMG(기관총) 총신이 나타났다. 그것도 1대가 아니라 2대였다. 대규모 예비군 훈련장이나 대대급 이상의 무기고에서 탈취해 왔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도청과 그 인근 옥상에 있는 계엄군을 겨냥해 가설했음이 분명했다. > >위 38의 사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기관총의 가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시민군이 적중률이 낮은 장난감 같은 M1이나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것과는 달리 중장비인 자동화기로 무장함으로써 도청옥상에 있는 공수부대가 위협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게릴라로 변신한 시민군과 본격적인 총격전 또는 시가전을 벌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시내 한 복판에서 벌어질 총격전은 시민의 피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곳에 기관총이 설치된 후 공수부대가 금방 철수한 탓도 있었지만 '''시민군은 이 기관총을 한발도 발사하지 않았다.'''」 >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5쪽 > >「(기관총 사격이 있었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 필자) 이 시간 도청 안에서 현장상황을 정확하게 목격했던 본 연구자로서는 이 기록에 상당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계엄군의 발포 때문에 옥상에는 없었지만 도청 안에서 기관총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설치과정까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한국일보 이상문 중방일보 황영철 기자로부터 ''''LMG 발사는 전연 없었다. 또한 금남로 관광호텔 앞이나 충장로에서 계엄군과 시민군 간의 교전은 전연 없었다. 또한 소수의 시민군이 대응발사는 있었으되 어디에서도 교전의 상황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LMG를 발사할 수 있는 경험자를 찾기만 했을 뿐 실제로 발사는 없었다''''는 증언을 들었다. 또한 도청을 바로 내려다보거나 전남대 병원을 건너다 볼 수 있는 전일빌딩 8층에 자리 잡은 전일방송국에서 종일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주시했던 당시 마삼열 전일방송국장은 같은 날 ''''전남대 병원에 LMG를 가설하는 광경은 나도 보았으나 발포사실은 없었고 금남로 관광호텔 앞의 계엄군과 시민군 간의 교전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라고 증언했다.」 >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5쪽 > >「시민군이 광주로 돌아와 전열조차 갖추지 못한 채 공수부대의 무차별 사격에 대응해 발사하고 나섰다. '''시가전이나 교전이라기보다는 목표지점도 없는 대응발사였다.'''」 >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2쪽 > >「'''당시 도청에서 취재하고 있던 본 연구자는 교전현장을 목격하지 못했고 함께 있었던 군 경 도청 관계자와 동료기자들로부터도 전연 듣지 못했다.''' 그리고 연구자는 다른 일행(도청 직원 및 기자)과 함께 오후 5시 24분, 계엄군의 철수에 앞서 도청 뒷담을 넘어 동국여관 골목으로 빠져나간 후 본사 사회부 소속 [[김충근]] 기자와 함께 충장로 입구를 거쳐 황금동쪽으로 이동했었다. 연구자 일행은 '''시가전의 위험은 전연 의식하지 않고 빌딩 옥상에 있는 계엄군 발포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는데 신경을 곤두 세웠었다'''.」 >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3쪽 > >응, 안했어. 당시 광주시민군은 '반폭력'개념으로 대응을 했을뿐이며 '대항폭력'에 속하는 저항폭력을 사용한 적이 없다. 심지어 온건파와 대립하고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강경파도 평화적 해결을 원했을뿐이며 주도적으로 총격을 한 게 아니라, 계엄군이 습격하니 대응하려고 총격전을 한거지, '''계엄군에게 '대항폭력'개념의 공격을 한 게 아니다'''. (김정한, 1980 대중봉기의 민주주의, 소명출판, 2013 212~225) >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71483|메갈)5.18 시민군이 계엄군 상대로 시가전을 벌였다는 주장에 대해]] ([[군사 마이너 갤러리]]) 군사 마이너 갤러리에선 당시 기자들과 도청 관계자의 증언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심지어 계엄군에 참여했던 사람조차 시민군들이 계엄군을 상대로 총격전을 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수백 명의 군인들이 도청 앞 도로에서 무방비 상태로 엎드려 있었는데,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시위대로부터 총격을 입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만약 그랬다면 노출된 우리 중에 하다 못해 다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더구나 오후 4시쯤 도청에 있던 우리 여단의 병사들이 조선대로 퇴각할 때 도로를 걸어서 퇴각하였는데, 만약 이때에 시위대가 총을 가지고 사격을 할 수 있었다면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이하생략) >이경남. >1980년 광주 민중항쟁 당시 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 소속 군인이었고, 현재는 강원도 횡성에서 감리교회 목사로 있다. 이 글은 이경남 목사가 1999년 『당대비평』에 투고해 실린 글입니다 >[[http://blog.ohmynews.com/itoon/186493|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메갈리아를 옹호하기 위해 광주시민들이 하지도 않은 폭력을 했다고 헛소리를 한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일베들이나 할 궤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